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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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고전주의 음악 시대를 대표하며 오페라, 협주곡, 교향곡, 현악 사중주 등 다양한 장르에서 9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이며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연주 활동을 펼쳤고, 요제프 하이든 등 당대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음악적 역량을 키웠다. 모차르트는 1780년대 후반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술피리', '피아노 협주곡 27번', '레퀴엠' 등 걸작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명료성, 균형, 투명성을 특징으로 하며, 후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죽음은 급성 류머티즘열, 연쇄상구균 감염 등 다양한 추측이 있으며, 쾨헬 번호(K. 또는 KV)로 작품을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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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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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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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로마자 표기 | Wolfgang Amadeus Mozart |
출생명 |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 |
별명 | 음악의 신동 |
출생일 | 1756년 1월 27일 |
출생지 | 잘츠부르크 대주교령 잘츠부르크, 오스트리아 |
사망일 | 1791년 12월 5일 |
사망지 | 합스부르크 제국 빈, 오스트리아 |
사망 원인 | 논란 중 |
국적 | 오스트리아 |
가족 |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어머니: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 누나: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 장남: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 차남: 프란츠 크사퍼 볼프강 모차르트 |
배우자 | 콘스탄체 모차르트 |
음악 활동 | |
직업 | 작곡가 |
활동 시기 | 1761년 - 1791년 |
장르 | 서양 고전 음악 |
악기 | 피아노 하프시코드 바이올린 |
주요 작품 목록 | 작품 목록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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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항 | |
발음 | 영어: 독일어: |
2. 생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56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궁정 음악가인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보여 세 살 때 건반 악기를 다루고 다섯 살 때 작곡을 시작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어린 모차르트와 누나 난넬과 함께 유럽 전역을 순회하는 연주 여행을 통해 아들을 음악 신동으로 알렸다. 이 여행을 통해 모차르트는 다양한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음악적 견문을 넓혔고, 유럽 전역에 명성을 얻었다.
성인이 된 후 잘츠부르크 궁정에서 음악가로 활동했지만, 고용주인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갈등 끝에 1781년 빈으로 이주하여 프리랜서 음악가로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그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빈에서 그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빠르게 명성을 얻었으며, 오페라 《후궁탈출》의 성공으로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1782년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다.
빈 시절은 모차르트의 창작 활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다. 수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여 직접 연주했고, 요제프 하이든과 깊은 우정을 나누며 그에게 현악 사중주를 헌정하기도 했다. 로렌초 다 폰테와 협력하여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등 걸작을 탄생시켰으며, 후기에는 39번, 40번, 41번 "주피터" 등 그의 대표적인 교향곡들을 작곡했다.
1780년대 후반부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마지막 해인 1791년까지도 오페라 《마술피리》, 《티토 황제의 자비》, 클라리넷 협주곡,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은 《레퀴엠》 등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다.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1791년 12월 5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2. 1. 유년기 (1756-1773)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궁정 음악가인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108] 7남매 중 막내였으나, 그와 다섯 살 위 누나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애칭 '난넬')만이 살아남았다.[51] 그의 세례명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la)였으며, 흔히 알려진 중간 이름 '''아마데우스'''(Amadeusde)는 그리스어 이름 '테오필루스'(Theophilusla)를 라틴어식으로 바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는데, 세 살 때 누나를 보고 스스로 건반 악기를 다루기 시작했으며,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직접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108] 다섯 살에는 이미 작곡을 시작하여 《난넬의 음악책(Nannerl Notenbuchde)》에 초기 작품들이 기록되었다.[110]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의 재능을 알리고 더 나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어린 모차르트와 함께 유럽 전역을 순회하는 연주 여행을 시작했다.[51] 1762년 뮌헨과 빈을 시작으로 파리, 런던,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신동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안정적인 궁정 직책을 얻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7세 때 프랑크푸르트에서 연주했을 때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그의 연주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53]
2. 1. 1. 탄생과 가족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de)는 1756년 1월 27일,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교회 공국이었던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의 수도 잘츠부르크(현재 오스트리아)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에서 태어났다.[1][108] 그의 아버지는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이고 어머니는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Anna Maria Mozart, 결혼 전 성은 페르틀(Pertl))였다.[1] 그는 일곱 자녀 중 막내였으며, 위로 다섯 형제자매는 유아기에 사망했고, 다섯 살 위의 누나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Maria Anna Mozart, 애칭 "난넬"(Nannerl))만이 살아남았다.[51][1] 당시 높은 유아 사망률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51]
모차르트는 태어난 다음 날 잘츠부르크의 성 루퍼트 대성당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세례 기록에는 그의 이름이 라틴어식인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la)로 기록되어 있다.[1] 흔히 알려진 중간 이름 '''아마데우스'''(Amadeusde)는 세례명의 중간 이름인 그리스어 '테오필루스'(Theophilusla, '신을 사랑하는' 또는 '신에게 사랑받는'이라는 뜻)를 라틴어식으로 바꾼 것이다. 성인이 된 후 그는 일반적으로 "Wolfgang Amadè Mozart"라고 서명했지만, 그의 이름에는 여러 변형이 있었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제국도시였던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으로,[109] 잘츠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경험 많은 교사였다. 1743년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악단에서 제4 바이올리니스트로 임명되었고, 4년 후 안나 마리아와 결혼했다. 1763년에는 오케스트라의 부 카펠마이스터가 되었다. 그는 아들이 태어난 해에 바이올린 교본인 ''Versuch einer gründlichen Violinschule''을 출판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레오폴트는 누나 난넬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부터 건반 악기를 가르쳤고, 세 살배기 볼프강은 옆에서 이를 지켜보았다. 훗날 난넬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종종 건반 악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3도 음정을 연주했고, 그 소리가 좋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네 살 때 아버지는 마치 게임처럼 건반 악기로 미뉴에트와 곡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 그는 완벽하게 그리고 매우 섬세하게, 정확한 박자를 유지하며 연주할 수 있었다. … 다섯 살 때 그는 이미 작은 곡들을 작곡했고, 아버지에게 연주하며 아버지는 그것을 적어 주었다.
이 초기 작품들, K. 1–5는 누나를 위해 작곡된 《난넬 악보집''Nannerl Notenbuch''》에 기록되었다. 레오폴트의 기록에 따르면 볼프강은 네 살 때 여러 곡을 배웠고 다섯 살 때 이미 작곡을 시작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을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K. 1a, 1b, 1c와 같은 초기 작품들이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작곡되었다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한다.[110][2] 어린 모차르트의 작곡 능력을 믿지 못한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시험하기도 했지만, 모차르트는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어린 시절 볼프강에게 아버지는 유일한 스승이었다. 레오폴트는 음악뿐만 아니라 언어와 다른 교양 과목들도 직접 가르쳤다.[3] 전기 작가 솔로몬에 따르면 레오폴트는 헌신적인 스승이었지만, 어린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넘어서 스스로 발전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3] 처음으로 잉크를 사용하여 작곡을 시도하거나 바이올린 연주를 스스로 익히려 했던 것은 레오폴트를 놀라게 했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확인한 후 자신의 작곡 활동을 점차 줄여나갔다.
2. 1. 2. 신동, 연주 여행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잘츠부르크 대주교령 수도였던 잘츠부르크(오늘날 오스트리아)의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에서 태어났다.[108][1]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잘츠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부카펠마이스터였고, 어머니는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였다.[109] 모차르트는 7남매 중 막내였으나, 다섯 명의 형제자매는 유아기에 사망했고, 다섯 살 위의 누나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애칭 '난넬')만이 살아남았다.[51] 모차르트는 태어난 다음 날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Jo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la였다. 흔히 알려진 중간 이름 '아마데우스'(Amadeusde)는 세례명의 그리스어 이름 '테오필루스'(Theophilusla, '신을 사랑하는 자' 또는 '신에게 사랑받는 자'라는 뜻)를 라틴어식으로 바꾼 것이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들의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보았다. 레오폴트가 7살 된 난넬에게 건반 악기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3살이었던 볼프강은 누나 곁에서 이를 지켜보며 스스로 건반을 다루고 3도 화음을 연주하며 즐거워했다고 전해진다.[108] 레오폴트는 4살 된 볼프강에게 미뉴에트와 같은 짧은 곡들을 가르쳤고, 볼프강은 완벽한 리듬감과 섬세함으로 연주해냈다. 5살에는 이미 직접 작은 곡들을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아버지가 이를 악보로 받아 적었다. 이 초기 작품들(K. 1–5)은 《난넬의 음악책(<0xEC><0x9B><0x90><0xEB><0xAC><0xB8> Nannerl Notenbuchde)》에 기록되어 있다. 현대 학자들은 K. 1a, 1b, 1c와 같은 초기 작품들이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작곡되었다는 점에 동의한다.[110][2] 어린 모차르트의 작곡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직접 시험해 본 이들은 그의 뛰어난 재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유일한 스승으로서 음악뿐만 아니라 언어와 일반 교양 과목까지 직접 가르쳤다.[3]
레오폴트는 아들의 재능을 널리 알리고 더 나은 기회를 찾아주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연주 여행을 계획했다. 1762년, 6살의 모차르트는 아버지와 함께 뮌헨으로 첫 연주 여행을 떠났고, 같은 해 9월에는 빈으로 가서 10월 13일 쇤브룬 궁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앞에서 연주했다. 이때 궁전 바닥에서 넘어진 모차르트를 당시 7살이던 황녀 마리 앙투아네트가 일으켜주자, 모차르트가 "크면 내 신부가 되어줘"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53]
1763년부터 1766년까지 이어진 서유럽 대여행에서 모차르트 가족은 독일의 여러 도시를 비롯해 파리, 런던 등을 방문했다. 이 여행은 어린 모차르트에게 큰 부담이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음악적 견문을 넓히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특히 1764년에서 1765년 사이 런던에서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만나 작곡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7살 때 프랑크푸르트에서 연주했을 때는 당시 젊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그의 연주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훗날 모차르트의 재능을 회화의 라파엘로, 문학의 셰익스피어에 비견하며 회상하기도 했다.[53]
이후 모차르트는 여러 차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음악 공부를 계속했다. 1769년부터 1771년까지 이어진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밀라노, 볼로냐, 로마 등을 순회했다. 로마의 시스티나 예배당에서는 문외불출의 비곡으로 알려진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9성부 합창곡 《미제레레》를 단 한 번 듣고 기억하여 악보로 완벽하게 옮겨 적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54] 나폴리에서는 당시 발굴이 한창이던 폼페이의 고대 로마 유적을 방문하기도 했다.[54] 이탈리아 여행 중 볼로냐에서는 저명한 음악 이론가이자 교사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마르티니 신부에게 대위법과 폴리포니 기법을 배웠다. 이 가르침은 훗날 모차르트의 원숙기 작품에서 중요한 작곡 기법으로 활용되었다.[55]
이러한 연주 여행을 통해 모차르트는 유럽 전역에 신동으로 이름을 알렸고, 1770년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금박차 훈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 볼로냐의 명망 있는 음악 기관인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Accademia Filarmonica di Bologna)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과 찬사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을 뿐, 실질적인 혜택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같은 해 작곡하여 밀라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첫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Mitridate, re di Ponto) K. 87의 작곡료는 매우 적었다.[56] 아버지 레오폴트는 여행을 통해 아들에게 더 안정적이고 좋은 직장을 찾아주려 했지만, 여러 궁정에 접촉했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취업에는 실패했다.
2. 2.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 시절 (1773-1781)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로 활동하던 모차르트는 점차 답답함을 느꼈고,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보수적인 궁정 분위기와 충돌을 일으켰다. 결국 1777년 8월,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의 직위를 스스로 사임했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처음에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두를 해고하려 했으나, 레오폴트의 해고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777년 9월 23일, 모차르트는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잘츠부르크를 떠나 아우크스부르크, 만하임, 파리, 뮌헨 등을 방문하는 긴 여행을 시작했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사촌 마리아 안나 테크라 모차르트(그가 '베제레'라 불렀던)를 만나 잠시 열정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57]
만하임에서는 당시 유럽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던 만하임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교류하며 음악적 영향을 받았다. 그는 만하임의 정확한 연주, 우아한 음색, 그리고 크레셴도 기법에 주목했으며, 이를 "젠체하는 만하임 양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58] 또한 만하임에서 음악가 프리돌린 베버의 딸인 소프라노 가수 알로이지아 베버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생각했지만,[59] 아버지 레오폴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8] 레오폴트는 아들에게 즉시 파리로 떠날 것을 명령했다.[60][61]
1778년 3월, 모차르트는 마지못해 파리로 향했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58] 샤보 공작 부인 등 귀족들에게 냉대를 받았고, 수입도 불안정하여[62] 귀중품을 전당포에 맡길 정도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1778년 7월 3일, 함께 파리에 온 어머니 안나 마리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자금 부족으로 의사를 제때 부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파리 체류 중 모차르트는 피아노 소나타 8번 가단조 (K. 310), 교향곡 31번 '파리' (K. 297),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다장조 (K. 299) 등 중요한 작품들을 작곡했다.
모차르트가 파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아버지 레오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아들을 위한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지역 귀족들의 지원으로 모차르트는 연봉 450플로린의 궁정 오르가니스트 겸 악장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그는 받기를 주저했다.
결국 파리에서의 성공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모차르트는 1778년 9월 파리를 떠나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만하임과 뮌헨에 잠시 머물렀다. 뮌헨에서 다시 만난 알로이지아 베버는 이미 성공한 가수가 되어 있었고, 더 이상 모차르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한 모차르트는 1779년 1월 15일 결국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새로운 직책을 수락했다.[10] 하지만 잘츠부르크의 환경과 대주교에 대한 그의 불만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이는 결국 1781년 대주교와의 결정적인 불화로 이어져 그가 빈으로 완전히 이주하는 계기가 된다.
2. 3. 빈 시절 (1781-1791)
1781년 1월, 뮌헨에서 오페라 이도메네오의 성공적인 초연 후, 모차르트는 고용주인 잘츠부르크 대주교 콜로레도의 명령으로 3월 빈으로 이동했다. 이는 요제프 2세의 즉위 축하 행사 참석을 위한 것이었으나, 모차르트는 빈에서의 더 큰 성공을 갈망했다. 하지만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갈등은 깊어졌고, 결국 1781년 5월 모차르트는 모욕적인 방식으로 해고되었다.[12] 이 사건은 그가 아버지 레오폴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12]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에 정착하여 프리랜서 음악가로 활동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솔로몬은 이를 그의 삶에 있어 "혁명적인 조치"라고 평가했다.빈에서 모차르트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그는 연주회 개최, 레슨, 악보 출판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1782년에는 오페라 『후궁탈출』(K.384)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12] 같은 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으며, 이후 예약 연주회를 위해 여러 편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이 시기 모차르트는 하이든과 돈독한 우정을 쌓았고, 1785년에는 그에게 헌정하는 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하이든 세트")을 완성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재능을 극찬하며 그의 아버지에게 찬사를 보냈고,[14] 1787년에는 프라하로부터 온 오페라 작곡 의뢰를 모차르트에게 양보하기도 했다.[63]
1786년에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K.492)이 빈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듬해 프라하에서는 더욱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성공에 힘입어 1787년 프라하에서 오페라 『돈 조반니』(K.527)를 초연했다. 같은 해 아버지 레오폴트가 세상을 떠났고, 이후 모차르트의 개인적인 기록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1788년에는 39번, 40번, 41번("주피터") 등 그의 가장 중요한 교향곡 세 편을 단기간에 작곡했다.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1780년대 후반부터 모차르트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그는 프리메이슨 동료였던 요한 미하엘 푸흐베르크에게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다. 1790년에는 오페라 『코지 판 투테』(K.588)를 초연했고, 레오폴트 2세의 즉위식에 맞춰 프랑크푸르트에서 사비로 연주회를 열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791년, 모차르트는 생애 마지막 해를 맞이했지만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 27번(K.595),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K.621), 징슈필 『마술피리』(K.620), 클라리넷 협주곡(K.622),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게 된 레퀴엠(K.626) 등 그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그러나 9월 프라하에서 『티토 황제의 자비』 초연 당시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11월 말 병상에 누워 레퀴엠 작곡에 몰두하다 12월 5일 새벽, 35세의 나이로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2. 3. 1. 프리랜서 음악가, 결혼
어린 시절부터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명성을 쌓은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궁정 음악가로 활동했으나, 자유로운 성격 탓에 고용주인 콜로레도 대주교와 잦은 갈등을 겪었다. 1781년 1월,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가 뮌헨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초연되었다. 그해 3월, 모차르트는 요제프 2세의 즉위 축하 행사에 참석하는 콜로레도 대주교를 따라 빈으로 소환되었다. 콜로레도에게 모차르트는 단순히 가까이 두고 부릴 수 있는 음악가에 불과했고, 실제로 모차르트는 하인들과 함께 식사해야 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빈에서 더 큰 성공을 꿈꾸며 황제에게 자신을 알리고자 했으나, 대주교는 모차르트가 자신의 허락 없이 외부에서 연주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그의 활동을 제약했다.[11]
대주교와의 갈등은 1781년 5월에 극에 달했다. 모차르트는 사직을 시도했지만 거부당했고, 다음 달에는 대주교의 집사인 아르코 백작에게 문자 그대로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모욕적인 방식으로 해고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를 완전히 떠나 빈에 정착하여 프리랜서 음악가이자 작곡가로 활동하기로 결심했다.[12]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아들이 대주교와 화해하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강하게 반대했지만, 모차르트는 빈에서의 독립적인 경력을 향한 의지를 열정적으로 변호했다. 이러한 결정은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꾼 "혁명적인 조치"로 평가된다.
빈에서의 새로운 경력은 비교적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자주 공연했으며, 특히 1781년 12월 24일 황제 앞에서 무치오 클레멘티와 벌인 피아노 경연은 주목할 만했다.[12] 이를 통해 그는 곧 "빈 최고의 건반 연주자"로 자리매김했다.[12] 작곡가로서도 성공을 거두어, 1782년 7월 16일에 초연된 오페라 《후궁탈출》(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곧 독일어권 유럽 전역에서 공연되었고, 모차르트의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12] 이 시기부터 자신이 직접 주최하는 연주회를 위해 여러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콜로레도와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모차르트는 빈으로 이주해 하숙집을 운영하던 만하임 출신의 베버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이전에 짝사랑했던 알로이지아 베버(당시 배우이자 화가인 요제프 랑게와 결혼한 상태)의 동생인 콘스탄체 베버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콘스탄체는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사촌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남아있는 편지에 따르면 1782년 4월, 질투심으로 인해 잠시 헤어지기도 했고, 특히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12] 결혼은 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와 동거하게 되면서 당시 관습상 불명예스러운 상황에 처할 수 있었고, 콘스탄체의 어머니가 딸을 집으로 데려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압박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12] 결국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동의 편지가 도착하기 하루 전인 1782년 8월 4일,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계약서에는 콘스탄체가 "신랑에게 500굴덴을 주고…신랑은 1000굴덴을 더 보태기로 약속했으며", 총액은 "생존자에게 돌아간다"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결혼 생활 중 공동으로 취득한 모든 재산은 공동 재산으로 남는다고 되어 있었다.[12]
두 사람은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중 유아기를 넘긴 자녀는 두 명뿐이었다.[12]
이름 | 생몰년 |
---|---|
라이문트 레오폴트 (Raimund Leopold) | 1783년 6월 17일 ~ 1783년 8월 19일 |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 (Karl Thomas Mozart) | 1784년 9월 21일 ~ 1858년 10월 31일 |
요한 토마스 레오폴트 (Johann Thomas Leopold) | 1786년 10월 18일 ~ 1786년 11월 15일 |
테레지아 콘스탄치아 아델하이트 프리데리케 마리아 안나 (Theresia Constanzia Adelheid Friedericke Maria Anna) | 1787년 12월 27일 ~ 1788년 6월 29일 |
안나 마리아 (Anna Maria) | 1789년 11월 16일 (출생 직후 사망) |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Franz Xaver Wolfgang Mozart) | 1791년 7월 26일 ~ 1844년 7월 29일 |
2. 3. 2. 전성기, 작품 활동
1781년 5월 9일, 잘츠부르크 대주교 콜로레도와의 갈등 끝에 해고된 후 빈에 정착하여 프리랜서 음악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빈에서의 새로운 경력은 비교적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자주 공연했으며, 특히 1781년 12월 24일 황제 앞에서 무치오 클레멘티와 벌인 연주 대결은 주목할 만했다.[12] 이를 통해 그는 곧 "빈 최고의 건반 연주자"로 인정받았다.[12] 작곡가로서도 성공을 거두어, 1782년 7월 16일 초연된 오페라 『후궁탈출』(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de)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독일어권 유럽 전역에서 공연되었고,[12]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1782년, 아버지 레오폴트의 반대를 무릅쓰고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한때 짝사랑했던 아로이지아 베버의 동생이자,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사촌이었다. 이 시기부터 모차르트는 자신이 직접 주최하는 연주회를 위해 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1782년과 1783년 사이, 고트프리트 판 스비텐 남작을 통해 바흐와 헨델의 작품을 접하고 깊이 연구했다. 이러한 바로크 음악 연구는 그의 음악 양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마술피리』(Die Zauberflötede)의 푸가 부분이나 교향곡 41번 피날레 등 후기 작품에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1783년 아내와 함께 잘츠부르크의 가족을 방문했다. 아버지와 누나는 콘스탄체에게 예의를 갖추었으나, 방문의 주된 성과는 그의 위대한 종교 음악 작품 중 하나인 c단조 미사 (K. 427)의 작곡이었다. 비록 미완성 상태였지만 잘츠부르크에서 초연되었고, 아내 콘스탄체가 소프라노 독창 파트를 불렀다. 같은 해 '피아노 소나타 11번 (터키 행진곡)'을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다(1778년설도 있다).
1784년경 빈에서 요제프 하이든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이 빈을 방문할 때면 함께 즉흥 현악 사중주를 연주하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1782년부터 1785년 사이에 하이든의 작품 33번에 대한 응답으로 평가받는 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하이든 사중주곡, K. 387, K. 421, K. 428, K. 458, K. 464, K. 465)을 작곡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했다.[13]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신 앞에서 정직한 사람으로서 말씀드리는데, 당신의 아들은 제가 개인적으로나 명성으로나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안목이 있고, 작곡에 있어 가장 심오한 지식을 갖추고 있습니다."라고 극찬했다.[14] 1787년에는 프라하로부터 오페라 작곡 의뢰가 들어오자 자신의 대신 모차르트를 추천하며 "만약 유력자가 그의 재능을 이해할 수 있다면, 많은 나라들이 이 보석을 자국의 견고한 성벽 안으로 가져오려고 경쟁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63]
1782년부터 1785년까지 모차르트는 직접 주최하는 예약 연주회를 통해 큰 인기를 누렸다. 매 시즌 3~4개의 새로운 피아노 협주곡을 발표하며 직접 독주자로 나섰다. 극장 공간이 부족하여 트라트너호프 아파트의 큰 방이나 멜그루베 식당의 무도회장 같은 비정규적인 장소를 예약하여 연주회를 열었다.[15] 이 콘서트들은 매우 인기가 많았고, 이때 초연된 협주곡들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레퍼토리로 남아있다. 솔로몬은 이 기간 동안 모차르트가 "열정적인 작곡가이자 연주가와 기뻐하는 청중 사이에 조화로운 연결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15]
콘서트와 다른 활동으로 상당한 수입을 올리면서 모차르트 부부는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을 택했다. 연간 임대료가 460플로린인 고급 아파트로 이사했으며,[16] 모차르트는 안톤 발터에게 약 900플로린에 고급 포르테피아노를 구입했고, 약 300플로린에 당구대를 구입했다.[16] 아들 카를 토마스를 값비싼 기숙학교에 보냈고 하인을 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 방식으로 인해 이 시기에 저축은 거의 하지 못했다.
1784년 12월 14일,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 단원이 되어 '자선(Zur Wohltätigkeit)' 로지에 가입했다. 프리메이슨 활동은 그의 남은 생애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으며, 모임에 참석하고 친구들 중 다수가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프리메이슨 장례식 음악과 같은 프리메이슨 관련 음악도 여러 차례 작곡했다.[17]

『후궁탈출』의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이후 몇 년간 오페라 작곡을 상대적으로 덜 했고, 피아노 독주자 및 협주곡 작곡가로서의 경력에 집중했다. 그러나 1785년 말경부터는 건반악기 작곡에서 벗어나 대본가 로렌초 다 폰테와 협력하여 오페라 작곡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1786년 5월 1일, 빈 부르크극장에서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it, K.492)을 초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이듬해 프라하에서 더욱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성공은 다 폰테와의 두 번째 협업 작품인 『돈 조반니』(Don Giovanniit, K.527)로 이어졌다. 이 작품은 1787년 10월 프라하 에스테이트 극장에서 모차르트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어 찬사를 받았으나, 1788년 빈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성공적이었다. 이 두 오페라는 모차르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오늘날 오페라 레퍼토리의 핵심이지만, 초연 당시에는 음악적 복잡성 때문에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쉽지 않은 작품으로 여겨졌다.
1787년 4월에는 젊은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 배우기를 희망하며 몇 주 동안 빈에 머물렀다고 알려져 있으나,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났다는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같은 해 5월 28일 아버지 레오폴트가 사망했다.[19] 아버지와의 서신 교환이 중단되면서 이후 모차르트의 삶과 생각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줄어들게 되어, 말년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현존하는 말년의 서신 대부분은 아내 콘스탄체 또는 채권자인 요한 미하엘 푸흐베르크에게 보낸 것이다.) 8월 10일에는 빈에서 유명한 세레나데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K. 525)를 작곡했다.
1787년 12월, 모차르트는 마침내 귀족의 후원 아래 안정적인 직책을 얻게 되었다. 요제프 2세 황제는 글룩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궁정 작곡가(Kammerkomponist)' 자리에 모차르트를 임명했다. 이는 연봉 800 플로린에 불과한 파트타임 임명이었고, 주로 레두텐잘(Redoutensaal)에서 열리는 연례 무도회를 위한 춤곡 작곡을 담당했다. 비록 수입은 많지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던 시기에 모차르트에게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궁정 기록에 따르면 이는 황제가 재능 있는 작곡가인 모차르트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빈을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가능성이 있다.
1788년에는 불과 몇 주 만에 39번 E♭장조, 40번 g단조, 41번 C장조 "주피터" 등 소위 "3대 교향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이 위대한 교향곡들이 그의 생전에 연주되었는지, 특히 40번을 제외한 나머지 두 곡이 연주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이 시기부터 모차르트의 수입은 점차 줄어들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프리메이슨 동료였던 요한 미하엘 푸흐베르크에게 빚을 청하는 편지들이 남아있다. 모차르트 자신의 행실이 좋지 않았고, 낭비벽에 더해 고액의 일에 기회가 없었던 것이 큰 원인이지만, 일각에서는 궁정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 등 이탈리아의 음악 귀족들이 암암리에 모차르트의 연주회를 방해하여 수입이 급감했다는 억측도 있다.
1790년 1월, 오페라 『코지 판 투테』(Così fan tutteit, K.588)를 초연했다. 2월에는 황제 요제프 2세가 서거하고, 레오폴트 2세가 즉위했다. 모차르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황제 즉위식에 동행하여, 그곳에서 사비를 들여 콘서트를 개최하고, 피아노 협주곡 26번 D장조 K.537 "대관식"과 피아노 협주곡 19번 F장조 K.459 "제2 대관식" 등을 연주하지만 관객은 적었다.
2. 3. 3. 경제적 어려움, 죽음

1780년대 후반 모차르트의 상황은 점차 어려워졌다. 1786년경부터 공개 콘서트 출연 빈도가 줄면서 수입이 감소했다.[20] 특히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은 귀족들의 음악 후원 여력을 감소시켜 빈 음악가들에게 힘든 시기였다. 1788년 모차르트의 수입은 전성기였던 1781년에 비해 66% 감소했다.
1788년 중반, 모차르트는 가족과 함께 빈 중심부에서 알저그룬트(Alsergrund) 교외로 이사했다.[20] 이는 임대료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는 해석도 있지만,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근거로 지출을 줄이지 않고 단순히 더 넓은 주거 공간을 원했을 뿐이라는 반론도 있다. 이 시기 모차르트는 친구이자 프리메이슨 동료인 미하엘 폰 푸흐베르크(Michael von Puchberg)에게 자주 돈을 빌렸으며, 도움을 간청하는 편지들이 다수 남아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모차르트가 이 시기에 우울증을 겪었으며, 이것이 음악 생산량 감소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마지막 세 개의 교향곡(39번, 40번, 41번, 모두 1788년 작)과 오페라 ''코지 판 투테''(1790년 초연)와 같은 주요 작품들을 작곡했다.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1789년 봄에는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베를린을 방문했고, 1790년에는 프랑크푸르트, 만하임 등 독일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모차르트가 말년에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수입 부족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낭비벽(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의상, 도박 등)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제기된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등 이탈리아 음악가들이 그의 활동을 방해했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억측으로 여겨진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해인 1791년은, 병세가 악화되기 전까지 높은 생산성을 보인 시기였으며, 개인적으로도 회복기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오페라 마술피리,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 K. 595, 클라리넷 협주곡 K. 622, 마지막 현악 5중주 K. 614, 모테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 K. 618,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은 레퀴엠 K. 626 등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많은 곡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1790년부터는 재정 상황도 점차 개선될 조짐을 보였다. 증거는 불확실하지만,[21] 헝가리와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후원자들이 가끔 작품을 의뢰하는 대가로 모차르트에게 연금을 약속한 것으로 보인다.[21] 그는 황실 궁정 작곡가로서 작곡한 무곡 판매로 이익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1] 모차르트는 더 이상 푸흐베르크에게 큰돈을 빌리지 않았고, 빚을 갚기 시작했다.[21] 특히 마술피리의 성공과 1791년 11월 17일에 초연된 소프리메이슨 칸타타 K. 623[22]의 공개적인 성공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나 1791년 9월 6일, 프라하에서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을 위해 작곡한 오페라 ''티토의 자비'' 초연 중 병을 얻었다. 그는 한동안 활동을 계속하여 9월 30일에는 ''마술피리''의 초연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으나, 11월 20일부터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병상에 누웠다. 부종, 통증, 구토 등의 증상을 보였으며, 아내 콘스탄체와 그녀의 여동생 조피 베버의 간호를 받으며 가족 주치의 토마스 프란츠 클로셋의 진료를 받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미완성 레퀴엠 작업에 몰두했으나, 제자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에게 악보를 받아적게 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오전 0시 55분경 빈의 자택에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3] 임종 시 성직자를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병자의 성유도 받지 않았다.
모차르트의 장례는 12월 7일 빈 외곽의 성 마르크스 묘지 공동묘지에 매장되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이는 당시 빈의 중산층에게 일반적인 장례 방식이었으며, 가난 때문에 초라하게 치러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뉴 그로브 사전 등의 설명이다. '공동묘지'는 빈민 묘지가 아니라 귀족이 아닌 일반 시민을 위한 개인 묘지를 의미하며, 10년 주기로 유골을 발굴하여 다른 곳으로 이장하는 방식이었다.[24] 장례식에 조문객이 거의 없었다거나, 살리에리, 쥐스마이어, 판 스비텐 등이 참석했다는 등 기록이 엇갈린다. 장례식 날 폭풍우가 몰아쳤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지만, 실제로는 잔잔하고 온화한 날씨였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 모차르트의 정확한 무덤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은 성 마르크스 묘지가 여러 차례 이장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정확한 사인은 오늘날까지도 불명확하다. 공식 기록에는 hitziges Frieselfieber|히치게스 프리젤피버de("좁쌀 같은 발진이 돋는 심한 열병")로 기재되어 있으나, 이는 현대 의학적 진단이라기보다는 증상에 대한 묘사에 가깝다. 그의 사인을 두고 급성 류머티즘성 열[30][25], 연쇄상구균 감염[26][27], 선모충병(트리키넬라증)[28][29](덜 익힌 돼지고기 섭취로 인한 식중독), 인플루엔자, 수은 중독, 희귀 신장 질환[30] 등 100가지가 넘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당시 유행했던 사혈 요법이 그의 죽음을 앞당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내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남긴 미완성 레퀴엠의 완성을 여러 제자에게 의뢰했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에게 맡겨 완성시켰다. 남편 사후 콘스탄체는 추모 음악회 개최, 미발표 작품 출판 등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공했으며 남편이 남긴 빚을 갚을 수 있었다. 1809년 그녀는 덴마크 출신 외교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과 재혼했고, 니센과 함께 모차르트에 대한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장례는 검소했지만, 그의 죽음 이후 빈과 프라하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의 명성은 사후에 오히려 급격히 높아져, 메이나드 솔로몬은 이를 "전례 없는 열풍"[31]이라고 표현했다. 슐리히테그롤, 니메체크, 니센 등이 앞다투어 그의 전기를 집필했고, 여러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 전집 출판을 위해 경쟁했다.[31]
3. 음악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오페라, 협주곡, 교향곡, 실내악, 교회 음악 등 당대의 거의 모든 음악 장르에 걸쳐 900곡이 넘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고전주의 음악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으며, 후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작품 식별에는 주로 쾨헬 목록(K. 번호)이 사용된다.[75] 모차르트 자신은 1784년 이후에 자신의 작품 목록을 작성했으나, 그 이전의 작품이나 모차르트 자신의 작품 목록에 실리지 않은 작품에는 작곡 시기가 불분명한 것도 있다.
3. 1. 개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여러 장르에 걸쳐 방대한 양의 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특히 오페라,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그리고 현악 사중주와 현악 오중주 작품들이 유명하다. 모차르트는 이 외에도 피아노 솔로, 여러 형태의 실내악, 미사곡 및 여러 교회 음악, 무곡들, 디베르티멘토 등도 작곡했다.작품 총수는 단편을 포함하여 900곡이 넘는다. 작품은 모든 장르에 걸쳐 있으며, 성악곡(오페라, 교회용 교회 음악, 가곡 등)과 기악곡(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피아노 소나타 등) 모두에 다수의 작품이 남아 있다.
작품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음악학자 루트비히 폰 케헬이 분류한 작곡 순서의 목록인 케헬 목록(K.+숫자)이 사용된다.[75] 모차르트 자신은 1784년 이후에 자신의 작품 목록을 작성했으나, 1784년 이전의 작품이나 모차르트 자신의 작품 목록에 실리지 않은 작품에는 작곡 시기가 불분명한 것도 있다.
장르 | 대표 작품 |
---|---|
오페라 | 후궁탈출,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 마술피리 |
교회 음악 | 대미사 다단조, 레퀴엠, 아베 베룸 코르푸스 |
교향곡 | 25번, 29번, 35번 하프너, 36번 린츠, 38번 프라하, 39번, 40번, 41번 주피터 |
세레나데 |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세레나데 노투르나 |
피아노 협주곡 | 20번, 21번, 22번, 23번, 24번, 26번 대관식, 27번 |
바이올린 협주곡 | 3번, 5번 터키풍 |
관악기 협주곡 | 클라리넷 협주곡, 플루트 협주곡 1번,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오보에 협주곡, 호른 협주곡 |
현악 사중주 | 하이든 사중주, 프로이센 사중주 |
현악 오중주 | 3번, 4번 |
기타 실내악 | 클라리넷 오중주, 오보에 사중주 |
피아노 소나타 | 11번 터키 행진곡 부속 |
피아노 변주곡 | 반짝반짝 작은별 변주곡 (프랑스 가곡 아, 어머니, 당신께 말씀드리겠습니다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다장조 K.265) |
3. 2. 주요 작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여러 장르에 걸쳐 방대한 양의 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 수는 단편을 포함하여 900곡이 넘으며, 성악곡(오페라, 교회 음악, 가곡 등)과 기악곡(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피아노 소나타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특히 오페라,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그리고 현악 사중주와 현악 오중주 작품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피아노 솔로, 여러 형태의 실내악, 미사곡 및 다양한 종교 음악, 무곡, 디베르티멘토 등을 작곡했다.작품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음악학자 루트비히 폰 케헬이 작곡 순서대로 분류한 목록인 케헬 목록(K. 또는 KV.+숫자) 번호가 사용된다.[75] 모차르트 자신은 1784년 이후에 자신의 작품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작곡되었거나 모차르트 자신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 중 일부는 작곡 시기가 불분명하기도 하다.
아래는 모차르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장르 | 주요 작품 |
---|---|
오페라 | 『후궁탈출』 (K.384), 『피가로의 결혼』 (K.492), 『돈 조반니』 (K.527), 『코지 판 투테(여자는 다 그래)』 (K.588), 『마술피리』 (K.620) |
교회 음악 | 대미사 다단조 (K.427), 레퀴엠 라단조 (K.626), 『아베 베룸 코르푸스』 (K.618) |
교향곡 | 25번 사단조 (K.183), 29번 가장조 (K.201), 35번 라장조 하프너 (K.385), 36번 다장조 린츠 (K.425), 38번 라장조 프라하 (K.504), 39번 내림마장조 (K.543), 40번 사단조 (K.550), 41번 다장조 주피터 (K.551) |
세레나데 |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K.525), 『세레나데 노투르나』 (K.239) |
피아노 협주곡 | 20번 라단조 (K.466), 21번 다장조 (K.467), 22번 내림마장조 (K.482), 23번 가장조 (K.488), 24번 다단조 (K.491), 26번 라장조 대관식 (K.537), 27번 내림나장조 (K.595) |
바이올린 협주곡 | 3번 사장조 (K.216), 5번 가장조 터키풍 (K.219) |
관악기 협주곡 | 클라리넷 협주곡 가장조 (K.622), 플루트 협주곡 1번 사장조 (K.313),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다장조 (K.299), 오보에 협주곡 다장조 (K.314), 호른 협주곡 (K.412, 417, 447, 495) |
현악 사중주 | 하이든 세트 (K.387, 421, 428, 458, 464, 465), 프로이센 왕 세트 (K.575, 589, 590) |
현악 오중주 | 3번 다장조 (K.515), 4번 사단조 (K.516) |
기타 실내악 | 클라리넷 오중주 가장조 (K.581), 오보에 사중주 바장조 (K.370) |
피아노 소나타 | 11번 가장조 터키 행진곡 부속 (K.331) |
피아노 변주곡 | 아! 말씀드릴게요, 어머니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다장조 (반짝반짝 작은별 변주곡) (K.265) |
모차르트 시대에는 오늘날의 "피아노곡", 피아노 소나타, 피아노 협주곡 등을 독일어권에서는 보통 "클라비어(Klavier)"라고 불렀다. 클라비어는 건반악기를 통칭하는 말이지만, 주로 현을 사용하는 건반악기, 즉 피아노포르테, 쳄발로(하프시코드, 클라브생), 클라비코드 중 어느 것을 선택하여 연주해도 무방하다는 의미로 쓰였다. 다만 협주곡과 같이 규모가 큰 편성은 피아노포르테나 쳄발로로 연주되었으며, 현대에는 시대 악기 연주가 활발해지면서 쳄발로로 연주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모차르트의 초기 작품 중 일부는 쳄발로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그는 레겐스부르크의 악기 제작자 프란츠 야코프 슈페트(Franz Jakob Späth)가 만든 피아노에 익숙했다.[81] 이후 아우크스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요한 안드레아스 슈타인이 제작한 피아노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 사실을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보낸 편지에 상세히 적었다.[81] 1777년 10월 22일, 모차르트는 슈타인이 제공한 피아노로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K.242)을 초연했다. 이때 아우크스부르크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뎀러(Demmler)가 제1파트를, 모차르트가 제2파트, 그리고 악기 제작자인 슈타인이 제3파트를 연주했다.[82][83] 1783년 빈에 정착한 후에는 안톤 발터가 만든 피아노를 구입하여 애용했다.[84] 모차르트가 이 발터 피아노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고 아꼈는지는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가 남긴 기록("이 소란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동생의 피아노는 그의 집에서 극장이나 다른 누군가의 집으로 최소 12번이나 옮겨졌다.")에서도 엿볼 수 있다.[85]
모차르트가 자신의 작품 악보에 '피아노포르테'를 위해 작곡했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1785년에 출판된 작품부터였다. 쳄발로는 흔히 바로크 시대 악기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빈에서는 19세기 초까지도 쳄발로가 제작되었으며, 베토벤의 작품 중에도 만돌린과 쳄발로를 위한 소나티네가 두 곡 남아있다.
3. 3. 음악적 특징과 영향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오페라,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현악 사중주, 현악 오중주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수많은 음악 작품을 남겼다. 이 외에도 피아노 독주곡, 다양한 형태의 실내악, 미사곡을 비롯한 종교 음악, 무곡, 디베르티멘토 등 다방면에 걸쳐 작곡 활동을 했다.모차르트의 음악 세계 형성은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교육과 어린 시절 유럽 순회 연주 경험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당시 유럽의 다양한 음악 양식을 접하며 자신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모차르트에게 영향을 준 주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영향 요소 | 내용 | 시기/장소 |
---|---|---|
잘츠부르크 음악 | 출생지에서 접한 음악으로, 우아하고 경쾌한 특징이 모차르트 음악의 바탕을 이루었다. 미하엘 하이든 등의 영향. | 유년기, 잘츠부르크 |
파리 음악 | 요제프 슈베르트, 에카르트, 르그랑 등의 영향으로 당시 유행하던 우아하고 경쾌한 클라브생 음악에 감명받음. | 1763년-1764년, 파리 |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 대 바흐의 막내아들인 크리스티안 바흐의 교향곡에서 많은 영향을 받음. 이 시기 그의 쳄발로 소나타를 편곡하여 쳄발로 협주곡 3곡을 작곡함. | 1764년-1765년, 영국 |
이탈리아 음악 | 마르티니 신부에게 직접 지도를 받으며 엄격한 대위법 음악에 대한 이해를 높임. 이탈리아 서곡과 오페라 부파 양식 습득. | 1770년, 이탈리아 |
전(前)고전파 작곡가 | 하이든, 바겐자일, 몬 등의 견고한 구성미를 지닌 음악에 자극받아 독일 음악을 재인식함. | 1773년 여름, 빈 |
갤런트 양식 | 미하엘 하이든의 우아한 작풍에 감명받아 모차르트 고유의 우아한 표현 방식이 발전함. | - |
요제프 하이든 | 1781년 빈 정착 후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깊은 유대 관계를 맺음. 하이든에게 헌정한 6곡의 현악 4중주곡(<하이든 4중주곡>) 작곡 (1782-1785). | 1781년 이후, 빈 |
모차르트의 음악은 하이든과 더불어 고전주의 양식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활동을 시작할 무렵 유럽 음악계는 바로크의 복잡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갈랑 양식이 주를 이루었다. 모차르트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후기 바로크의 대위법적 복잡성을 새로운 형식과 미학에 맞게 통합하고 발전시켰다. 그는 교향곡, 오페라, 독주 협주곡, 실내악(특히 현악 사중주와 현악 오중주), 피아노 소나타 등 당대의 모든 주요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특히 고전주의 피아노 협주곡 장르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38]
고전주의의 특징인 명료성, 균형, 투명성은 모차르트 음악 전반에 나타나지만, 그의 걸작들, 예를 들어 피아노 협주곡 24번 C단조(K. 491), 교향곡 40번 G단조(K. 550), 오페라 ''돈 조반니'' 등에서는 단순함 이면에 숨겨진 강렬한 힘과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찰스 로젠은 "모차르트 작품의 중심에 있는 폭력과 관능을 인식해야만 그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의 위대함을 통찰할 수 있다"고 평가하며, 그의 음악에 내재된 고통과 공포의 표현이 충격적일 만큼 관능적이라고 지적했다.
모차르트는 말년으로 갈수록 색채적 화성을 빈번하게 사용했는데, 현악 사중주 19번 '불협화음' C장조(K. 465, 1785)의 서주 부분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그는 다른 작곡가들의 장점을 흡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여행을 통해 접한 J. C. 바흐의 음악,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연주력, 이탈리아의 오페라 양식 등은 그의 독창적인 작곡 언어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38] 초기에는 갈랑 양식의 영향을 받아 단순하고 가벼우며 명확한 구조의 음악을 주로 작곡했지만, 점차 성숙해지면서 교향곡 29번(K. 201)의 대위법적 주제 사용이나 하이든의 현악 사중주 영향으로 보이는 푸가적인 피날레 등 바로크 시대의 특징들을 통합해 나갔다. 폭풍과 열정 양식의 영향 또한 교향곡 25번 G단조(K. 183) 등에서 나타난다.
모차르트는 오페라와 기악곡 작곡을 병행하며 두 분야 모두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와 같은 오페라 부파, ''이도메네오''와 같은 오페라 세리아, 그리고 징슈필의 대표작인 ''마술피리'' 등 다양한 장르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후기 오페라에서는 악기 편성, 오케스트라의 질감, 음색의 섬세한 변화를 통해 감정의 깊이를 더하고 극적인 효과를 높였는데, 이러한 기법은 그의 교향곡과 협주곡 등 기악곡 작곡에도 영향을 미치며 상호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모차르트의 작품 대부분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뢰를 받아 작곡된 것이다.[77] 당시 예술가들은 교황이나 귀족 등 후원자의 지원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베토벤처럼 독립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79] 따라서 그의 작품 중 장조의 밝고 우아한 곡이 많은 것은 당시의 수요를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사후에는 의뢰 없이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추구하는 작품들도 작곡하기 시작했다. 또한, 후원자였던 프리메이슨의 영향은 ''마술피리''나 피아노 협주곡 20번 등 일부 작품에서 나타난다.[80]
모차르트는 후대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고전 음악 교육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44]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모차르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1787년에는 직접 배우기 위해 빈으로 가기도 했다.[45]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작품을 모델로 삼기도 했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 D단조(K. 466)를 위한 카덴차(WoO 58)를 작곡하는 등 존경심을 표했다. 베토벤은 자신의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에게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 1악장 주제만큼 훌륭한 선율을 생각해낼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작곡가들이 모차르트의 주제를 바탕으로 한 변주곡을 작곡하며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 외에도 페르난도 소르(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서주와 변주곡, 1821), 미하일 글린카(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주제 변주곡, 1822), 프레데리크 쇼팽("Là ci darem la mano"에 대한 변주곡, 1827), 막스 레거(모차르트 주제에 대한 변주곡과 푸가, 1914) 등이 있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관현악 모음곡 4번 ''모차르티아나''(1887)를 작곡했다.[46] 조아키노 로시니는 모차르트를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고 칭송했으며, 구스타프 말러는 임종 시 모차르트의 이름을 불렀다고 전해진다.
모차르트의 가장 유명한 제자는 요한 네포묵 후멜[43]이었는데,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의 전환기 인물로서 어린 시절 모차르트 부부의 비엔나 가정에서 2년 동안 머물렀다.
3. 4. 쾨헬 번호
모차르트의 방대한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노력 끝에, 1862년 루트비히 폰 쾨헬이 처음으로 성공적인 목록을 완성했다. 그는 모차르트가 작품을 작곡한 연대순으로 고유 번호를 부여했는데, 이것이 바로 쾨헬 번호이다.이 쾨헬 번호는 모차르트의 작품을 명확하게 식별하는 표준적인 방법으로 사용되며, 보통 약어 'K.' 또는 'KV'와 함께 숫자를 붙여 표기한다 (예: K. 550). 쾨헬이 1862년에 처음 발표한 이 목록은 이후 학술 연구를 통해 작품의 작곡 연대나 진위 여부 등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여러 차례 수정 및 보완되었다.
모차르트 자신도 1784년 이후부터는 자신의 작품 목록을 작성했지만, 그 이전의 작품이나 목록에서 누락된 작품들의 작곡 시기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단편을 포함하여 900곡이 넘는 모차르트의 전체 작품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쾨헬 번호는 필수적인 도구로 자리 잡았다.[75]
3. 5. 죽음의 원인
모차르트는 1791년 9월 6일,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 축하 행사를 위해 의뢰받아 작곡한 오페라 ''티토의 자비''의 프라하 초연 중 병이 들었다. 그는 한동안 직무를 계속 수행했고, 9월 30일에는 ''마술피리''의 초연을 지휘했다. 11월 20일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그는 침대에 누워 부종, 통증, 구토 증상을 겪었다.
모차르트는 마지막 날에는 아내와 아내의 여동생이 간호했고, 가족 주치의인 토마스 프란츠 클로셋(Thomas Franz Closset)이 진료했다. 그는 자신의 레퀴엠을 완성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했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자정 12시 55분에 자신의 집에서 사망했다.[23] 당시 빈의 관습에 따라 모차르트는 12월 7일 시 외곽의 성 마르크스 묘지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공동묘지"라는 표현은 공동묘지나 빈민묘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즉, 귀족이 아닌)을 위한 개인묘지를 의미한다. 일반인의 묘지는 10년 후에 발굴되었지만, 귀족의 묘지는 그렇지 않았다.[24] 후일의 보고서에서 언급하듯이, 조문객이 없었다면 그 또한 당시 빈의 매장 관습과 일치한다. 후에 오토 얀(1856)은 살리에리, 쥐스마이어, 판 스비텐과 다른 두 명의 음악가가 참석했다고 기록했다. 폭풍과 눈이 내렸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그날은 잔잔하고 온화했다.
모차르트의 사망 원인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빈 시(市)의 공식 기록에는 "급성 속립진열"로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공식 기록에는 "심한 발진열"(severe miliary fever, 기장 씨앗처럼 보이는 발진을 가리킴)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진단보다는 증상에 대한 묘사에 가깝다. 실제 사인은 "류머티즘성 염증열"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68] 류머티즘은 유년기의 잦은 여행 생활 중에 걸린 것으로 여겨진다.[69] 연구자들은 급성 류머티즘성 열,[30][25] 연쇄상구균 감염,[26][27] 트리키넬라증,[28][29] 인플루엔자, 수은 중독, 그리고 희귀한 신장 질환 등 100가지가 넘는 사인을 제시했다.[30] 또한, 의사가 사망 직전에 실시한 사혈이 증상을 악화시켰다는 말도 있다.
모차르트는 1791년 7월, 자신이 아쿠아 토파나(별명으로 나폴리수라고도 불렸던 비산이 주요 성분인 수용액으로, 당시에는 미용약이었지만 독으로도 유명했다)로 독살당할 뻔했다고 생각하고 아내에게 그것을 전했다. 실제로 아내의 편지에 "나를 질투하는 적이 돈가스에 독을 넣었고, 그 독이 온몸을 돌아다녀 몸이 붓고 온몸이 아프고 고통스럽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당시에는 시체의 부종이 독살의 증거라고 여겨졌고, 모차르트의 시체가 심하게 부어 있었기 때문에, 살리에리에 관한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또한, 사후 빈의 신문은 "독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1820년경이 되면 빈에서는 "로시니를 추종하는 이탈리아파와 베버를 추종하는 독일파의 논쟁·대립 속에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유행했다. 살리에리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자신의 목을 자르려고 했고, 많은 배임 행위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소문에 살리에리는 1825년에 죽을 때까지 시달렸다.[70]
3. 6. 프리메이슨 활동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했다. 1784년 12월 14일에 프리메이슨 '자선' 지회에 가입하였고, 이후 장인을 거쳐 마스터 메이슨의 지위까지 올랐다.[116] 당시 프리메이슨 가입은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드러내는 의미가 컸으며, 친목 단체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될 것은 아니었다.4. 모차르트를 소재로 한 작품
- 1830년: 푸시킨의 희곡 Моцарт и Сальери|모차르트 이 살리에리rus.
- * 1897년: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 희곡을 바탕으로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오페라)』를 작곡했다.
- 메리케의 소설 Mozart auf der Reise nach Prag|모차르트 아우프 데어 라이제 나흐 프라크deu.
- 1972년: 실비 바르탕의 싱글곡 슬픔의 교향곡.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제1악장 멜로디에 이탈리아어 가사를 붙인 곡이다.
- 1979년: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
- * 1984년: 밀로스 포먼 감독이 이 희곡을 영화화했다.
- 1982년: 프랑스 TV 드라마 '모차르트'. 총 6부작, 540분 분량으로 마르셀 브뤼알 감독이 연출했다.
- 1985년: 서독 영화 Vergeßt Mozart|페어게스트 모차르트deu. 모차르트의 사인을 추적하는 추리 드라마 형식이다.
- 1985년: 오스트리아의 가수 팔코의 음악 'Rock me Amadeus'.
- 1985년: 모리 마사히로의 소설 '모차르트는 자장가를 부르지 않는다'.
- 1989년: 후쿠야마 요우지의 만화 마드무아젤 모차르트.
- * 1991년: [http://www.ongakuza-musical.com/ 음악좌]가 이 만화를 뮤지컬로 각색했으며, 2004년에는 『21C: 마드무아젤 모차르트』라는 제목으로 재공연했다.
- 1999년: 뮤지컬 모차르트!. 미하엘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가 제작했으며, 일본에서는 2002년에 초연되었다.
- 2005년: TEAM NACS의 무대 공연 'COMPOSER〜울려 퍼지는 선율의 소리'. 모리사키 히로유키가 각본을, 야스다 켄이 연출을 맡았다.[105]
- 2006년: G. 파자노 작곡, V. 세사-비탈리 작사의 동요 'Wolfango Amedeo (볼프강 아마데우스)'. 같은 해 제49회 제키노 도로에서 우승했다.
- 2009년: 메리 포프 오즈본 작가의 아동 문학 시리즈 매직 트리 하우스 제27권 '모차르트의 마법의 피리'.
- 2009년: 프랑스 뮤지컬 록 오페라 모차르트. 올리비에 다앙 연출, 도브 아티아와 알베르 코앙 제작.
- 2017년: 체코・영국 합작 영화 프라하의 모차르트 유혹의 가면무도회.
- 뮤지컬 모짜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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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일반
[98]
잡지
CUE'S
2006-05
[99]
서적
モーツァルト=二つの顔
講談社選書メチエ
[100]
서적
モーツァルト書簡全集
白泉社
[101]
서적
モーツァルトの脳
[102]
서적
モーツァルトの脳
[103]
서적
モーツァルトの脳
[104]
웹사이트
"フルート嫌い"のモーツァルト、お金のために仕事をした―東京藝大准教授・高木綾子さんに聞く
https://www.huffingt[...]
huffingtonpost
[105]
웹사이트
「生理がないのが悔しい」TEAM NACS安田顕の役づくりがスゴすぎる! 鈴木亮平も唖然
https://www.excite.c[...]
2021-02-11
[106]
웹사이트
Famous Freemasons M-Z
http://www.lodgestpa[...]
[107]
서적
ニューグローブ世界音楽大事典
講談社
[108]
서적
Austria
Baedeker
[109]
참고자료 # harvnb는 일반적으로 참고문헌 스타일이므로, 더 구체적인 정보가 없으면 '참고자료'로 분류
[110]
IMSLP # IMSLP는 특정 유형이므로 그대로 사용
Andante in C major, K.1a; Allegro in C major, K.1b; Allegro in F major, K.1c
[111]
참고자료
[112]
웹사이트
The Letters of Wolfgang Amadeus Mozart. (1769–1791)
https://www.gutenber[...]
2021-02-05
[113]
간행물
Mozart and the pianos of Gabriel Anton Walter
[114]
웹사이트
Demmler [Demler, Dümmler], Johann Michael
Oxford University Press
[115]
웹사이트
Mozart: Briefe und Aufzeichnungen
https://www.cengage.[...]
[116]
웹인용
모차르트는 왜 열렬한 프리메이슨이 되었나
http://navercast.nav[...]
201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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